몸 꽃 Blooming Made

May 28, – June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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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보리 Hur Boree

Press

고귀한 것들의 내려앉음: 허보리의 회화

1.

가로 3.22미터, 세로 1.92미터의 그림. 그 커다란 화면에서 흰색과 녹색 계열 물감을 듬뿍 묻힌 작가의 붓이 밀알을 쌓듯 겹치고 겹쳐 식물 군집을 만들고, 물결치듯 일렁이며 그 군집들 사이로 길을 내었다. 또 가로 35센티미터, 세로 27센티미터의 캔버스 42개를 합쳐 전체 크기 가로 3.24미터, 세로 1.40미터가 된 그림. 그 크지만 조각조각 나뉜 화면에서는 아기의 볼 주위로 크림이 뭉개지듯, 대기 중에 솜털이 날리듯, 노란색과 녹색 계열 붓질이 행해지며 꽃들의 향연을 연출했다. 42번째 생일을 맞은 작가를 자축하듯, 42개의 캔버스에 그렇게 살아있는 존재의 촉감과 운동성이 담겼다.

   지금 나는 이 문장을 작가 허보리의 <메밀추상>(2023)과 <42개의 봄조각>(2022)을 도판으로 보며 쓴다. 나는 그 그림의 디테일을 보며 약간 기분 좋은 어지러움을 경험한다. 그리고 제목에서 힌트를 얻었건 그림의 이미지를 보며 연상해서건 그 두 작품이 메밀밭과 유채꽃밭을 모티프로 했음을 알아채지만, 그런 사실이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 두 개의 회화는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의 미학이 규정하듯 “사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에 속하는 ‘예술적 대상(artistic object)’이다.1) 요컨대 몸과 정신의 통합적 주체로서 작가가 캔버스에 물감을 써서 그린 예술작품이다. 그렇기에 감상자에게 그 그림들은 물건으로 쓰거나 객관적 정보로 환원할 수 없는 미적 경험을 유발한다. 이를테면 나처럼 <메밀추상>에서 두텁게 흩뿌려진 밀알을 떠올릴 수 있고, <42개의 봄조각>에서 뜬금없이 아기의 볼과 코 위로 뭉개지는 크림을 연상할 수도 있다. 혹은 근대문학가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1936)을 읽은 어느 감상자라면, 허보리의 <메밀추상>에서 밀알 대신 소금이 연녹색 대지 위로 하얗게 내려앉은 이미지를 떠올릴지 모른다. 미적 경험은 각자의 자유인 셈이다.

   이렇듯 현실의 물질로부터 그 물질을 넘어선 어떤 감각 지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곧 미학(aesthetics)에서 말하는 예술 창작이며 예술을 통한 물질의 승화(sublimation)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글에서 주목하는 허보리의 경우는 그 방향이 좀 특이하다. 말하자면 그녀는 미술의 심오한 이상을 추구하며 현실의 메밀밭이라든가 유채가 만개한 봄의 들판을 모방해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허보리는 켜켜이 쌓인 일상의 단면들이 어느 순간 특정한 의미로 다가올 때 그 생각에 시각적 표현을 부여한다. 예술에 비해 언제나 이미 덧없고 구차한 것이 생활인데, 작가는 그 단편들을 미술의 언어를 통해 유의미하게 만드느라 작업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핏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앞서의 방식이 예술을 위한 현실의 변형이라면, 허보리는 후자를 위해 예술의 언어를 쓴다.

 

2.

“내 작품은 밥과 살림, 가족과 멀지 않다.”2) 이 문장은 허보리가 2022년 개인전 도록에 쓴 작가 노트의 일부다. 일견 순진한 발언 같지만, 현대미술에 훈련된 이들에게는 잠깐 숨을 들이마셔야만 할 것 같은 말이다. 작가의 작업이 먹고 사는 일, 가족과의 삶이라는 틀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현대미술계의 대다수는 그 당연한 생각이 자기 일의 주제 혹은 개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인 만큼 날 것 같기 때문이다. 또 원초적인 단계에 속하는 문제인 만큼 동시대 미술의 첨단 과제에 비해 수준이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대미술에 담기는 개념들이 미학적 관념이나 미술사적 지식에 입각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가령 일반인의 소소한 경험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이념,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선 순수미술(fine art)의 논리 같은 것으로 말이다. 맞는 생각이지만, 허보리의 경우는 반전이 있다. 요컨대 그녀의 미술은 일 하러 나가는 가족의 목에 걸린 넥타이에서, 가족의 먹거리로 산 고깃덩어리에서, 작업실로 가는 길에 멈춰서 한참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들판의 일렁임에서 작업의 표현법을 발견하고 미술의 의미를 만든다.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 얻는 생각과 생명을 꾸려나가면서 하는 일들이 곧 작업의 개념이 되는 셈이다. 요컨대 허보리의 작업에서 개념은 은유적 의미를 넘어 직설적으로 몸이고, 먹이이고, 돌봄이고, 살아감이다.

   이 작가의 작업 노트에 쓰인 다음과 같은 말들은 허보리라는 생활인이자 미술계 작가가 속한 시간과 공간을 보여주며, 그 시공간 안에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하는지 엿볼 수 있게 한다. 가령 “풀멍”, “우물 같은 작업실에 고여 있는 나 자신”, “식물로 다이빙”, “내 몸을 온전히 그곳에 숨길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기”3). 또는 “42번의 유채”, “나 자신을 정육하는 이 느낌”, “매번 찾아오는 배고픔과 끼니를 챙기는 것”, “나의 분신인 이 그림을 42조각내어 한 모퉁이만을 갖게 되는 어느 컬렉터의 상황”4) 임의로 고른 말들이지만 어쩐지 우리는 그 속에서 때로는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는 우리 각자를, 또 때로는 창작하는 동안 온갖 감정과 생각에 부대끼면서도 결코 그 곳을 빠져나오지 않는 한 미술가를 보는 것 같다.

 

 

 

 

3. 

최근 몇 년 동안 허보리는 유독 꽃들을 중심 소재로 삼아 추상회화의 표현력을 극대화한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는 회화의 진부하고 대중적인 범주로서 일명 ‘꽃그림’ 일반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아니면 국내는 물론 유럽의 젊은 여성 작가들이 형상을 붓질 기법에 따라 해체해서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으로 완성하는 동시대 회화 트렌드에 속하는 것처럼도 보일 것이다.5)실제로 허보리의 꽃 그림은 매화, 수선화, 라벤더, 국화, 장미 등 현실의 꽃을 모티프로 그린 것이 맞다. 하지만 그 모티프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구상회화(figurative painting)와는 거리가 멀다. 허보리가 그리는 꽃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처럼 대상의 형태를 다이내믹한 붓질로 분할하거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처럼 화면에 물감을 흩뿌리고 뭉개고 흘리는 과정을 무수히 쌓아올려서 만들어진다. 때문에 그 그림들은 가까이 볼 때 전혀 꽃으로 보이지 않고 대신 물질들이 얽히고설키는 난장, 질료의 카오스처럼 느껴진다. 대체로 인체 사이즈를 훌쩍 넘는 그림 크기 때문에 감상자 입장에서는 더욱 그런 느낌을 강렬하게 경험하게 된다. <매화추상>과 <매화연구> 시리즈, <Iris Abstract>와 <Lavender Abstract> 시리즈가 특히 그러한데, 그 회화 작품들에서 꽃은 귀엽고 예쁜 개체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스펙터클한 군집으로 현상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득 앞뒤가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실 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업을 한다는 작가와 순수미술 내부의 정통성 있는 범주로서 추상회화를 탐구하는 작가가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다. 나는 허보리에게 분명 그 모순이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허보리의 미술에서 일관성을 찾거나 작가를 대표하는 미술 양식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학부를 거쳐 대학원 석사를 마친 2006년 이후 이 작가의 작업들이 부드러운 조각, 가변설치, 퍼포먼스, 삽화적 드로잉 등으로 다양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허보리가 그렇게 여러 미적 형식과 스타일을 선택해 작품을 제작할 때도 그 동기이자 근간은 생활에 있었다. 여기서 허보리의 작업 계열을 모두 논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사례만 다루자면, 가령 <Soft K9>(2017) 시리즈는 남자들이 입었던 양복과 셔츠, 넥타이를 해체한 후 새로 바느질을 해서 대한민국이 독자 개발한 K9 자주포를 닮은 조각을 만든 것이다. 허보리는 어느 날 목깃이 번들번들해진 남편의 슈트를 정리하다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삶이 직물에 배어있다고 생각해서 <Soft K9>을 시작했다. 작가는 아마도 땀에 절어 낡아진 양복에서 노동의 불가피함과 생계의 끝없는 절박함을 읽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일터는 곧 전쟁터라는 깨달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것이고, 작가로서는 리얼리티를 위해 남편의 양복을 그리기보다는 그 양복을 질료로 해서 조각품을 만드는 것이 진실했을 것이다. 요컨대 그 작품 또한 몸, 먹거리, 삶을 살아냄이라는 명제로부터 멀지 않다.

   그럼 다시 허보리의 꽃 그림으로 돌아와서, 그것들은 어떤 현실성을 배경으로 하는가. 단순한 사실은 작가가 제주에 기거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풍경들 속의 꽃이 그림의 모티프라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고 싶다. 우리가 보는 허보리의 꽃 그림들은 분명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컬렉터가 구매해서 소장할 수 있는 완결된 작품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실 생활에서 그것은 회화라는 거대한 예술 분야에 대한 끝없는 자기 탐구다. 매일의 육체노동이 수반되어야 하고, 엄청난 양의 시간과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하고, 무수하게 많은 붓질을 해도 평면 위에서 그 흔적이 눈 녹듯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해나가야 하는 탐구. 미적(aesthetic)이지만 결코 아름답다고(beautiful) 할 수만은 없는 그리기 작업인 것이다.

   이상 논한 내용을 고려할 때, 허보리의 미술은 스펙트럼이 넓다. 그 스펙트럼은 동시대 미술계에 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논리적 전략이나 다양한 매체 실험 같은 수평적 차원이 아니다. 그와 달리 허보리의 예술 스펙트럼은 수직적이다. 그녀가 미술의 기반으로 삼는 것이 먹고 자고 작업하며 살아가는 생활이라는 점과 그 미술의 지향점이 현실의 가치를 자신의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그 양상을 삶에서 고귀한 것들이 미술이라는 협소한 대지 위로 내려앉는 것이라 표현하고 싶다. 허보리는 의식적으로든 직관적으로든 그 사이 공간을 탐색하며 멈춤 없이 작업해오고 있다.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1) 베네데토 크로체, 『미학 Estetica』, 권혁성•박정훈•이해완 옮김, 북코리아, 2017, p. 140.

2) 허보리, 「풀의 춤」, 《허보리 풀의 춤》 개인전 전시도록, 통일갤러리, 2022, p. 4.

3) 허보리, 「작가 노트」, 《허보리 채집자》 개인전 전시도록, 갤러리 플래닛, 2023, 페이지 표기 없음.

4) 허보리, 「풀의 춤」, 같은 도록, pp. 4-5.

5) Su-mi Kang, “Power, Intuition, Sensation: British Young Women Artists”, A New British Modernity Exhibition Catalog, 2025, pp. 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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