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민-단위들 간의 관계가 이룬 자신의 운명
보이지 않는 내면이 아니라 보이는 일상용품을 가져와서 표현하려는 일련의 시도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이미 20세기 초 뒤샹은 그가 선택하고 구입하여 미술작품이라고 규정했던 대량 생산물을 지칭하고자 ‘레디메이드’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작가의 선택과 아이디어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는 그의 주장이 새삼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대량 생산된 흔해 빠진 물건을 선택함으로써 예술 대상은 독특해야 한다는 관념에 도전하는 뒤샹의 반미학적 행위는 기성품의 일상적인 위치를 극적으로 변질시켰다. 미술과 비미술, 미술과 일상이 결합한 것이다. 이후 팝아트를 위시해서 일련의 현대미술은 명백하게 평범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사물, 물질에 몰두하는 한편 일상으로부터 주제를 적극적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상투적이고 상식적인 것을 넘어서는 작가의 창의적 시선이 매우 중요해졌음도 일러주었다.
이혜민은 쓰다 남은 천을 이용해 구체적으로 인지 가능한 대상을 만들어 보인다. 작가가 만든 것, 재현한 것은 배게 또는 쿠션 형태다. 그것들은 실제보다 훨씬 작은 크기로 이루어졌다. 미니어춰와도 같은 이 베개는 알록달록한 다양한 색채를 머금은 천의 콜라주로 형성되거나 단색의 폴리코트나 브론즈로 견고하게 성형/캐스팅되었다. 동일한 형태 안에서 재료를 달리하고 크기와 집적하는 방법론의 차이가 색채, 질감, 무게의 차이 역시 동반하면서 매번 새로운 감각과 지각을 발생시키고 있다. 익숙한 사물을 다른 수준으로 새롭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조각과 기성품 사이의 경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한편 그것들은 원래 그 사물이 속해있던 평범한 일상 세계를 확인시켜 주는 속성을 잃고 있지 않다. 베개는 머리를 받쳐주는 도구이자 휴식과 잠자리, 꿈과 욕망, 질병과 죽음, 휴식과 타인과의 접촉 등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이며 자전적인 서사나 에피소드를 풍성하게 간직하면서 보는 이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부단히 자극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의 베개는 본래 레디메이드의 무심함에서 이탈된다. 작가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들에서 개인적인 내러티브를 추출해 내는 한편 누구나 알고 있고 소유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다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소재에 기반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천과 붕대 등의 유약하고 부드러운 재료가 반복해서 집적되어 덩어리를 이루거나 천으로 이루어진 것을 캐스팅해서 쌓아 올라가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혜민의 작업은 오브제와 이를 다시 브론즈나 폴리코트로 성형한 것, 그리고 일련의 페인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이루어진다. 자투리 천들을 이어붙이고 바느질을 해서 이룬 것들은 일상품들을 한데 모아 구성한 미술작품인 아상블라주에 속하기도 하고 또는 정크아트적인 속성도 지니고 있다. 한편 그것들은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거나 옆으로 이어지면서 증식된다. 단일한 하나의 단위가 연속적이고 연쇄적으로 반복되어 번져나간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선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동일 개체의 무한한 반복성, 윤회적인 흐름을 연상시킨다. 이는 형태상으로 맹렬한 기세로 증식하는 생명체의 본성을 은유하기도 하고 모종의 경계를 지우고 무한한 시간을 의도적으로 투여하는 작업의 농도를 가시화한다. 브랑쿠시의 <무한주>를 연상시키는 이 수직의 배열은 동일한 하나의 단위/유닛이 축적되어 고이는 양상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문화에서는 하늘에 치성을 드릴 때 흔히 이 고임의 모드를 활용한다. 석탑이나 돌쌓기, 제사상에 놓인 고인 음식 등이 모두 그렇다. 하늘에 부단히 육박해가고자 하는 이의 정성이 시각화되고 공간에 구체적으로 그 마음이 물질화된다.
작가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색상의 천 조각이나 흰색의 석고붕대를 작은 단위로 해서 이를 화면에 붙여나가는, 일종의 콜라주 작업을 선보인다. 석고붕대의 경우 물을 묻히면 본래의 것과는 다른 견고한 물성으로 바뀐다. 화면 가득 차곡차곡 쌓이고 집적되어 매달려있는 것들이 조명을 받으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면서 흡사 순백의 웨딩드레스나 화려한 레이스를 연상시키면서 빛난다. 낡고 버려진 천 조각이 부드럽고 편안한 휴식과 수면을 피곤을 풀어주는 베개가 되고 상처를 감싸고 에워 쌓다가 버려지는 기능을 지닌 석고붕대가 신부의 눈부신 드레스가 되는 이 존재의 변이는 하찮고 쓸모없는, 비중심적이고 아웃사이더이자 타자의 것으로 여겨지는 물질이 주인공이 되는 변신의 과정에 다름아니다. 남루하고 비근한 재료, 일상의 소재들이 또 다른 존재로 환생 되어 주목을 받는 대상으로 순간 이동하는 기묘한 환각도 제공하는 것이다. 액틀, 액자를 만들고 남겨진 나머지 것들끼리 집적시켜 평면의 오브제 회화를 만든 작업도 동일한 맥락 속에서 출현한다. 그림을 돋보이게 하거나 사각의 화면을 감싸며 회화를 보호하는 액틀이 그림 자체가 되는, 그래서 그림에서 배제되거나 부차적 존재인 파레르곤이 에르곤이 되는 도치를 선보인다. 이는 작품 자체가 에르곤(Ergon), 액자를 파레르곤(Parargon) 이라고 하는 데리다의 이론을 연상시킨다. 데리다는 파레르곤은 작품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따라 움직이고, 작품에 대항해 일어나기에 둘 다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추구하는 에르곤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담아내고 에르곤이 되게 하는 파레르곤 역시 중요하다는 말이다. 파레르곤(액틀)은 경계를 정하고, 공간을 공간이 되게 하는가 하면 작품을 작품이 되게 해주는 것이다. 동시에 작품의 내, 외부를 규정하는 틀을 부단히 지워나가는 전략이기도 하다. 사실 그러한 한계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외부에서 발생한다. 예술작품 안에 고유한 본질이 존재한다는 사유를 해체하는 것인데 이혜민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전통적인 미술의 재료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늘상 삶의 중심에서 타자로 자리매김되는 것들을 주목하고 그것을 그림의 내용으로, 주제로, 볼거리로, 의미 있는 그 무엇으로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단지 재료 구사나 방법론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으로도 밀고 나간다. 소박하고 비근한 것들, 하찮은 것들, 소소한 일상의 오브제를 변형시키거나 위치이동을 시켜 핵심적인 존재로 만드는 전략이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는 방식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때 모든 단위들, 파편적인 재료들은 저마다 고유한 존재로 존중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단위들 간의 관계가 작품의 핵심이 된다.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한 작업과 함께 나란히 등장하는 일련의 페인팅도 그런 맥락에서 출몰한다. 캔버스 표면에는 용해된 물감들이 누적되는데 이 수용성의 물감들은 발려진 동시에 스스로 유동적으로 몰려다니고 엉기고 스며들면서 자신들끼리 무엇인가를 이룬다. 화면은 물감의 질료적 속성과 그 본성에 따라 자연스레 시간과 중력 등에 힘입어 모종의 길을 만들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전개한다. 모노톤에 유사한 이 페인팅은 실은 흥건한 물감이 뒤섞여 스스로의 장력에 따라 화면을 채워나간 형국을 만들어 보이면서 결코 단일하지 않은, 풍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표면을 일구어낸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최종적으로 우연과 자연의 소산이다. 여기서 물감/색은 선험적으로, 목적론적으로 무엇인가를 의도해서 보여주거나 계획되지 않는다. 그림의 최종적인 얼굴은 비확정적이라 알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물감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만든 그런 결과물이다. 우리들 모두가 저마다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자기 성좌를 절박하게 그려나가듯이 말이다.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