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outs

Jul 6, 2022 – Aug 5, 2022
*일요일은 휴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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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리 Jeanie Lee

지니 리 사용자 입문서

“우리의 활동 하나하나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를 넘어선다.” – 브뤼노 라투르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라고 하면 얘기의 범주가 너무 넓어질 것 같아서 소설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낫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혜안은 미술과 미술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미술보다는 미술가를 이야기하는 게 조금이나마 구체적이어서 말문을 트기 쉬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쉽다’는 것은 저 광활한 미술의 대양을 헤엄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구명보트에 몸을 싣거나 백사장에 기댈만한 인용문을 찾은 것뿐, 미술가를 만나는 일을 업으로 삼은 나에게도 미술가는 여전히 특수하고 기묘한 존재다. ‘어렵다’는 얘기다. 미술의 중력을 견디는 이기적인 행성, 제각기 빛나고 싶은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감추고 싶지는 않은 행성. 만약 누군가 나에게 미술의 정의를 묻는다면 그 행성과 행성 사이의(interstellar) 불가사의한 틈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이라고 얼버무리고 자리를 뜰 것 같다. 어떤 작용은 중력을 견디고 어떤 작용은 중력을 거스르며, 어떤 작용은 한정된 시공간에 머물고 어떤 작용은 시공을 초월하며, 어떤 작용은 우리를 멈춰 세우고 어떤 작용은 우리를 떠밀며, 어떤 작용은 보송보송하고 어떤 작용은 눅눅하며, 어떤 작용은 사변적이고 어떤 작용은 실천적이며……. 세상에 뿌려진 무수한 언어와 이미지를 인용하고 차용하며 해독하는 ‘인덱스(index)’, 나에게 미술가는 그런 종족이다.

구글에 따르면 인덱스는 책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단어, 항목, 인명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일정한 순서에 따라 별도로 배열한 목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심 섞은 질문을 던질 법도 하다. 미술가의 일이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인덱스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추앙’할만한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정보기술과 엔터테인먼트와 게임과 패션이 시대의 경험과 이미지를 압도적으로 장악한 이 시대에 미술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란 말인가. 종교인도, 교수도, 소설가도, 프로듀서도, 건축가도, 요리사도, 정치인도, 최고경영자도, 범죄심리학자도, 아동상담가도, 예술가도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생존하는 시대, 지금 즉시 유무형의 재화로 환산되는 ‘좋아요’로 이어지지 않으면 사용자의 관심이 실시간으로 휘발되는 시대, 스크린과 현실 풍경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현재’에만 충실한 사람들 앞에서 미술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소셜 미디어에 최적화된 짧고 가벼운 이미지를 만드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걸까, 다수 집단의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문화적 가치나 정체성을 차용하는 전유(appropriation)와 빼앗긴 문화적 가치를 되찾아왔다고 자위하는 재전유(reappropriation)라는 철지난 담론을 반복해서 외쳐야 하는 걸까. 차라리 그런 근거 없는 자기만족 따위는 집어치우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을 봐야 하고, 긴장을 창출하고,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동류집단과 발맞추며, 확산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시장을 따르고, 시장과 협력하는 마케터로 살아야 한다는 ‘경영 구루’ 세스 고딘의 ‘마케팅’ 금언에 순종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가벼운 것의 문명이 가벼운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의 메시지에 힘을 얻어 하이퍼 모던 시대의 인류학적 요구를 미학적, 기술적 가치로 전환시킨다는 자존감을 확대재생산하는 게 나을까. 아무리 그럴듯한 주석을 달아도 확실한 근거를 제언할 수 없는 없는 시대, 그럼에도 나는 감히 추앙해도 좋다고, 아니 추앙해야 한다고 말하려 한다. 아무리 미술이 MZ세대의 소셜(social)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미술가가 셀럽이라는 신(新)부족에 작전상 후퇴를 선언한 신세가 되었다고 해도 노동(work)의 결과물(works)로서의 미술이 (재)구성하는 언어와 이미지의 맥락은 동시대의 경험과 이미지의 방정식을 푸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요충분조건이라는 확고부동한 조건은 저버릴 수 없다.

여기, 지니 리의 노동의 결과물을 보자. 당신은 필히 가볍고 경쾌한 팝(pop)적 이미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제목 ‘Cutouts(오려진 것, 잘라낸 것, 찢어낸 것)’이 드러내는 것처럼 오리는 종이 인형 작품 <페이퍼 돌(Paper Doll)> 시리즈와 이미지나 문구를 잘라내어 붙인듯한 <컷아웃(Cutouts)> 시리즈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별도의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포토제닉하고 SNS 친화적인 작품인가. #페이퍼돌 #컷 #CUT #컷아웃 #CUT_OUT이라는 해시태그만으로 취향 소비를 세련되게 드러낼 수 있는 반가운 전시. 그러나 미술이라 할 만한 것은 당신이 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어서 미술가는 언제나 노동의 결과물에 일말의 진실을 심어놓는 법이다. <페이퍼 돌>은 작가의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추억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편집자는 69세 딸이 93세 어머니를 사진으로 담은 전시를 보러 갔다가 주저앉아 우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중년의 여성 관람객이었다는 점에 주목해 ‘그들을’ 위한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당시 사십대였던 나와 삼십대였던 그는 그 눈물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것 같아서 한 권의 사진집으로 완성시켰더랬다. 그러나 우리는 사진집을 만들며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뭔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저릿함을 느꼈지만 공감이란 그러게 쉬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한 권의 책을 만들 때건 한 줄의 글을 지을 때건 감동과 공감이라는 단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니 리는 어떤 공감대를 상상하며 인형을 오린(그린) 것일까. 조심스럽지만 작가와 인생의 궤적을 엇비슷하게 걸어온 동년배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오래전 전래동화를 인용하는 것처럼 남세스럽지만 가왕(哥王) 조용필의 노랫말처럼 작가의 그림 인형 앞에서 우리는 바람소리처럼 멀리 사라져 간 인생길에서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를 물을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웃고 어떤 날은 울고 어떤 꽃은 지고 어떤 꽃은 피는 세상에서 모두 같이 떠나가는 처지인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 글을 쓰기 위해 작품을 먼저 살펴본 어느 봄날, 나는 형형색색의 옷을 대입하고 조합하다가 이내 쓸쓸해졌다. 겉으로는, 아니 소셜 미디어에서는 화려하게 보여주고 드러내고 과시하지만 안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공허한 삶을 반복하는 나를 그림 인형에게서 발견했다고 할까. 헨리크 입센이 『인형의 집』을 통해 정형화된 남녀 역할에 의문을 던지고, 허위의식과 기만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던 것처럼 팝적인 이미지로 도출된 인형의 옷을 통해 작가는 소셜 미디어의 허위에 감춰진 인간의 진실에 도달하고 싶었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건 <컷아웃> 시리즈도 마찬가지여서 작가는 외부에서 오려낸 이미지와 언어를 가져와 자르고 붙이는 콜라주라는 단순한 방법론으로 스크린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선택하고 올리고 해시태그를 다는 2020년대의 풍경을 가감 없이 전한다. 작가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메시지 드로잉’의 연속에서 지니 리는 이렇게 묻는 듯하다. 언제부터 우리는 나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활동을 ‘광고’하게 되었을까요? 스크린 세상은 팬톤(pantone) 컬러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색을 찾지 못하고 흑백으로 사는 것 같지 않으세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소리 없이 분노하며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걸까. 그 해답을 찾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저는 색(色)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요’가 아니었을까.

‘소셜이냐 개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질문을 안고 돌아온 그날, 나는 언젠가 보았던 안도 다다오의 인터뷰를 찾아서 다시 읽었다. ‘건축은 추상적인가, 구상적인가’라는 난해한 질문 앞에서 안도 다다오는 “나에게 건축이란 구상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포함하여 성립하는 것”이라는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명쾌하면서도 명료하지 않은 세계적인 건축가의 혜안에서 나는 아노미적인 네트워크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단서를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그건…… 결국 미술이었다. 추상성과 구상성을 동시에 작용시켜 시간-경험-이미지를 창출하는 일, 그 방법과 형식이 축적되어 시간을 견뎌 장르가 되고, 그것이 ‘동시대’라는 특정한 분기점으로 가늠되어 역사[美術史]로 기록되는 신화에 귀의하기로 했다. 미술이 걸어온 지난한 시간의 뒤안길에서 미술가는 ‘본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확신하고 의심하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지혜로운 자로 살아왔다. 소셜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용자’로서의 우리도 그러하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것을 확인하되 의심을 거두지 않는 일. 그리하여 그 속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가치를 채굴하기. 미술가가 그 일을 행함으로써 빛나는 존재가 되고 주변이 아름다워지듯이 네트워크 시대의 ‘사용자’도 그 헛된 진실에 도달하려다보면 빛나는 존재가 되고 그 주변이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아이들은 종이인형 앞에서 행복해한다. 수많은 종이인형 가운데 자기 눈에 쏙 들어오는 취향의 옷을 직감적으로 알아채고 척척 조합한다. 어른이 된 당신은 어떤 종이인형, 아니 ‘그림’ 인형에 마음이 동하는가. 지난 10여 년 세상과 SNS와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방에서 그리는 일에만 열중해온 지니 리의 그림 인형을 어떻게 ‘코디’할 것인가. 서두를 필요 없다. 그 엇갈린 조합을 눈으로 반복하다 보면 그 시절의 나는 어떤 아이였는지, 지금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를 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그림 인형은 나를 위해 준비되고 마련되어 있었음을, 그림 인형은 결국 나였음을.

일찍이 철학자 데카르트는 인간을 ‘마음을 가진 기계’라고 말했다. 1995년 불세출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만든 일본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떠올리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차례로 묻게 되었다고 자신의 저서 『철학이라 할 만한 것』에 고백했다. 한낱 허황된 판타지로 여겼던 SF가 더 이상 가공의 스토리텔링으로 치부하기 힘든 세상의 격변 속에서 ‘언젠가 인간과 인형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는 날이 오는 게 아닐까’라는 천재 감독의 근원적 의문은 허위가 아닌 사실적 실감으로 다가온다. 지니 리라는 미술가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닐까. 그림 인형을 그리고(자르고) 자르는(그리는) 행위를 반복하며 우리가 감지하는 세계는 존재하는가, 느낀다고 여기는 우리는 정녕 존재하는가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불교에서는 자기 능력을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백팔십도 회심’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이미 모든 진리를 밝히셨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 수행자는 스스로 세워야 한다고 믿었던 생각의 체계를 떨쳐버린다고 그들은 여긴다. 세상 그 무엇이 내가 될 수 있음을, 내가 그 무엇이 될 수 있음을, 나아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으로 나누는 행위에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깨달음. 비록 나는 미천하여 그 경지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리얼리티와 버추얼 리얼리티 사이에서 흔들릴 필요가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메타버스는 무엇인가, 메타버스 속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진짜인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육신이 딛고 서 있는 세상이 실재한다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마치 스무고개 같은 질문을 넘고 파헤치다보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된다는 ‘해체’의 순간은 실재하는 것인가, 그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나는 지금의 나인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종교적 경지로 귀의해야 실마리를 잡을 것 같은 혼돈 속에서 지니 리의 그림 인형은 우리의 사유가 미치지 못하는 장소,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인간 이후’의 세계라는 현대적 실재론에 이미 가 있는 것 같다.

2022년 어느 여름 그림 인형과 마주하는 날, 나는 작가가 그렇게 그렸듯이 수행하는 자세로 오랫동안 응시하려고 한다. 또 아는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림 인형이 나를 향해 눈을 깜빡일지, ‘이 옷은 어때?’라고 말을 걸어올지. 어린 시절, 우리가 인형에게 말을 걸며 놀았던 것처럼 말이다. Shall we?

윤동희 / 영상커뮤니케이션, 북노마드 대표

Relative Artist

지니 리 Jeanie Lee

지니 리 Jeanie Lee 지니 리 Jeanie Lee 2018 acrylic on paper 54.5cmx79cm지니 리 Jeanie LeeChica 2018 acrylic on paper 54.5cmx79cm지니 리 Jeanie LeeChica 2019 acrylic on paper 54.5cmx79cm지니 리 Jeanie LeeChico 2018 acrylic on paper 54.5cmx79cm지니 리 Jeanie LeeChica (yellow) 2020 acrylic on canvas 82cmx62cm지니 리 Jeanie LeeChica (green) 2020 acrylic on canvas 82cmx62cm지니 …